JOB인터뷰: 서지은 약사 "노력하면 꿈꾸는 대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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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에서 이민자로서 다양한 직업군에서 활동하고 있는 인물들을 만나보는 시간. 오늘은 한국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다 호주 이민 후 약사로 재취업에 성공한 서지은 씨를 만나본다.


홍태경 PD: 오늘은 호주에서 약사로 근무 중인 서지은씨와 만나보겠습니다. 연결돼 있는데요. 안녕하세요.

서지은: 안녕하세요 서지은입니다.

홍 PD: 반갑습니다. 현재 하시고 계시는 일에 대해 간단히 좀 소개 부탁드릴게요.

서지은: 호주에서 약사로 근무하고 있는 서지은입니다. 현재 환자에 대한 돌봄을 최우선의 가치로 두고 있는 테리와이트(TerryWhite) 약국의 찰스타운(Charlestown) 지점에서 Clinical Pharmacist로 풀타임으로 일하고 있고 쉬는 날에는 Consultant Pharmacist로 제가 일하는 약국으로 의사들이 보내온 홈 메디케이션 리뷰, 가정 방문, 약 점검 의뢰를 받아서 환자들의 집을 일일이 방문하고 그 집 안에서 약을 잘 복용하는지 부작용은 없는지 하는 상담 일을 하고 있어요.

홍PD: 그렇군요. 저희가 알고 있는 약사로서의 업무보다 굉장히 그 범위가 넓다는 생각이 드네요. 가정 방문도 하시는군요. 그런데 현재 이렇게 약사로 일하고 계시지만 사실 이전에는 간호사로 근무를 하셨잖아요.

서지은: 네 맞아요.

홍PD: 그렇게 직업을 바꾼다는 게 사실 쉽지 않은 과정이 필요했을 것이라 생각이 드는데요. 어떤 계기가 있으셨나요?

서지은: 약사라는 직업은 제 어릴 적 꿈이었습니다. 제가 살던 작은 동네에서 마치 수퍼맨 수퍼우먼 같은 존재의 약사 부부가 계셨어요. 엄마는 세 아이를 키우면서 생기는 작은 건강상의 일들을 언제든지 그분들에게 찾아가서 조언을 듣고 약을 받으셨어요. 질문을 하면 모르는 게 없이 언제나 친절하게 알려주셨고 저도 언젠가 그들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그래서 중앙대학교 약대를 목표로 공부했지만 약대는 못 갔고요. 대신 당시에 IMF가 있던 때라 간호학과 인기가 높았어요. 그래서 엄마는 제가 누군가 돌보는 일을 참 좋아하는 걸 알고 간호사라는 직업을 추천해 주셨고 결국 목표였던 학교로 간호학과로 진학했습니다.근데 당시 학부 생활에 약대 건물이 간호학과 옆에 있었는데요, 늘 바라보면서 부럽기만 하고 또 졸업 이후에 그 병원에서 간호사로 사회생활을 처음 하면서 많이 힘들었어요. 그래서 1년 만에 퇴사를 결정하고 수능을 봐서 약대 갈 준비를 했습니다.

그랬는데 대학도 졸업하고 사회생활도 해본 다음에 공부하는 게 너무 힘들었고요. 결국 두 번째 도전에서도 실패를 했어요. 그러다가 우연히 간호협회 신문에 난 뉴카슬 대학으로의 간호학과 편입 광고를 봤고요. 수능 공부 때 탄탄히 쌓았던 영어 실력으로 아엘츠 7.0을 받아서 3학년으로 편입하고 25살에 혼자 호주를 왔거든요. 그리고 간호사로 일하다가 현재 신랑을 만나 3명의 아이의 엄마가 되고 육아를 하다가 좋은 기회에 늘 약사였던 꿈이었던 저를 지지해준 신랑 덕분에 약대에 입학하고 또 꿈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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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PD: 그렇군요. 굉장히 긴 과정이 필요했네요. 그런데 호주에 간호학과로 다시 이주를 하게 되시면서 처음에 이제 한국의 전공을 살려서 직업을 이어가시려고 했던 거잖아요.

서지은: 네 맞아요. 호주로 이주할 때는 사실은 호주에 거주할 생각은 없었고요. ‘미국에서 학위를 따고 한국의 모교로 와서 교수를 하고 싶다’ 이런 계획으로 갔어요. 미국에 삼촌이 사셨거든요. 근데 너무 무섭더라고요. 그래서 ‘호주로 가서 실력도 쌓고 영어 수련도 하고 앵클렉스(Nclex)라는 시험을 봐서 미국에 가야 되겠다’ 하고 당시에는 그레이 아나토미(Gery’s Anatomy)라는 미국 드라마를 기숙사 방에서 맨날 틀고 24시간 틀고 영어만 들리게끔 노력을 하면서 막 살았거든요. 그러다가 근처에 있는 교회 신랑을 만나서 호주에 정착을 하게 됐죠.

홍PD: 인생이 지나가는 그 과정은 참 그 계획대로 되지만은 않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뜻을 갖고 있으면 또 그 방향으로 꼭 흘러가게끔 되어 있다는 생각이 서지은 씨를 보면서 느끼게 됩니다. 결혼과 육아 과정을 거치면서 상당 기간 좀 경력 단절 기간이 불가피하잖아요. 그런데 또 세 자녀가 있으시다고요?

서지은: 맞아요.

홍PD: 그런데 다시 또 약대 공부를 하시게 된 것도 굉장히 큰 결심이 필요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진행하신 거예요?

서지은: 맞아요. 2006년 당시 간호학과를 졸업하고 뉴카슬에 제가 살고 있는 병원에 취직하는 게 사실 한국 간호사한테 굉장히 어려웠어요. 영어 소통이 안 되거나 또 그런 부분에 어려움이 많은 사람들은 시드니에 있는 병원으로 취직하고 뉴카슬까지 2시간 반을 매일같이 출퇴근하는 선배님들이 많이 계셨거든요. 그런데 저는 운이 좋게 뉴카슬에 있는 병원에 취직했고 신규 1년을 보내는 사이에 신랑을 만났고요. 2년 차에 응급실 수련 간호사로 발령이 났는데 임신을 한 거예요. 그래서 너무 입덧이 심해서 일을 그만두고 또 첫 아이를 출산하고 키우는 사이에 다시 또 응급실을 가고 싶더라고요. 일을 하고 싶고 그래서 연락을 했더니 ‘캐주얼로 와라’ 그래서 갔는데 제가 또 둘째 아이를 임신을 하게 돼서 또 시작된 육아 때문에 아예 간호사를 포기했어요.

그리고 ‘마음껏 아이들에게 집중하고 육아하자’ 이렇게 생각하고 셋째도 가지면서 가족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살았거든요. 근데 당시 제가 살던 곳에는 한국 사람이 많이 없었고 제가 또 호주 사람들 사이에서 끼지 못하고 외롭게 육아를 했거든요. 그래서 그걸 생각하면서 제가 맘스치노라는 플레이 그룹을 만들었어요. 그래서 한국 엄마들하고 모임을 만드는데 그 과정에서 제가 ‘이 땅에 내가 왜 왔을까 호주까지 와서 그냥 아이들만 커가는 걸 바라보고 있는 게 맞을까’라는 회의가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병원을 가서 일하려고 하니까 그 교육 기관이 시드니에 있고 그러니까 경력이 5년이 지나면 다시 그 교육 절차를 받아야 되는데요, 그 기관이 시드니에 있고 또 그 시간을 소비하면서 다시 병원으로 간다면 좀 어린 아이들과 함께하는 것이 너무 불가능해 보였어요. 그러다가 차라리 다른 공부를 해볼까… 제가 아이를 낳았으니까 조산사는 어떨까?이런 생각을 하다가 대학교 홈페이지에서 조산사를 찾다가 혹시나 하고 약대를 찾은 거예요. 그래서 약대 입학 절차를 알아보고 이메일을 보내니까 당시에 간호학과 졸업 성적을 사용할 수 있다고 해서 약대 입학이 가능했었습니다.

홍PD: 하지만 호주에서 약사로 일하시려면 그 공부하는 과정도 굉장히 힘들다고 알고 있고요. 또 세 자녀를 키우시면서 성적도 약대 최고 학점으로 우등 졸업을 하셨어요. 진정한 동기부여가 있지 않으면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서지은: 1등이든 꼴등이든 결국 이수 과목을 패스해서 졸업하고 약사 보드 시험에 합격하면 결국 내가 가진 처방전을 다루는 약사가 사실 어떤 성적으로 졸업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죠. 저는 영어가 모국어도 아니고 같은 동기생보다 나이가 한참 많았어요. 제가 36살에 입학을 했는데 친구들이 거의 18살, 19살이었거든요. 수업 후에 집에 오면 또 돌봐야 되는 어린 아이들도 3명이나 있고 제가 가진 조건은 정말 수업을 따라갈 수 없는 어려운 환경이었거든요. 그렇지만 저에게는 약대 입학이 두 번의 좌절 끝에 주어진 제가 정말 바랐던 기회였어요. 이 힘든 과정 속에서 존재하는 적은 제 자신이고 또 스스로에게 실망을 시키고 싶지 않았어요.

또 무엇보다 이렇게 열악한 상황에 있는 저를 사용하셔서 나타내고자 하는 목적과 사명이 있는 종교적인 믿음도 컸고 제일 중요한 건 현실적으로 사랑하는 남편이 불평 하나 없이 집안일에 아이들 픽업해주고 돌봄해주는데 제가 작은 테스트라도 좋은 점수를 받아오면 너무 좋아하는 거예요. 그래서 신랑이 힘들게 애써주는데 그에 보답으로 좋은 성적을 주고 싶었고 그걸로 신랑이 자랑을 많이 하더라고요. 그게 너무 흐뭇했어요. 그리고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꿈을 갖고 노력하면 안 되는 게 없다는 것.

홍PD: 정말 좋은 본보기가 된 어머니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아이들에게는요. 그리고 남편분도 정말 아내분을 자랑스러워하셨군요. 많은 분들에게 약사라는 직업은 사실 처음에 말씀하셨던 것처럼 여러 가지 굉장히 세분화된 업무가 있는 것 같은데요. 주로 어떤 업무를 지금 하고 계신 거예요?

서지은: 호주는 의사를 만나는 게 사실 한국보다는 좀 어렵고 아무래도 약국에 가면 의료 관련 지식을 가진 약사들이 있잖아요. 그래서 약사를 자신의 건강 문제를 제일 처음으로 상담하는 사람으로 인식을 많이 해요. 더군다나 호주의 땅이 굉장히 넓고 한국의 2배 이상 그리고 인구는 70배가 적잖아요. 그러다 보니 시골에 위치한 호주의 시골들은 병원도 없고 그래서 약사가 지역 주민들에게 해주는 일들이 참 많아요.

알다시피 처방전을 주면 그 관련된 약을 주고 기본적인 상담 업무를 하는 일 외에도 최근에는 지속적인 피임약 공급을 위해서 피임약을 처방해 주기도 하고 또 요로 감염을 치료할 수 있는 항생제 처방권도 지금 약사가 가지고 있고요. 기본 예방접종인 코비드 백신, 독감, 파상품 같은 주사도 주고 혹시 외국에서 백신을 맞으면 그걸 호주 건강 기록에도 넣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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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코비드 락다운이 해제된 이후 해외 여행이 많이 늘면서 의사들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정부가 많은 약사들에게 권한을 주고 있고요. 여행 관련된 백신 상담이나 백신 접종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또 건강 사보험 회사와 연계를 많이 맺어 혈당이나 혈압, 콜레스테롤 테스트를 하면서 예방의학 상담을 많이 하기도 하고요. 또 아파서 일을 못 가게 되면 약사의 치료 범위 안에서 식리브(Sick leave)을 받을 수 있게 서티피케이트(certificate)도 써주고 이미 제조되어 판매하지 않는 약들을 직접 제조도 합니다. 멜라토닌이나 고농도의 비타민D 피부과 크림, 호르몬 알약 등이요.

홍PD: 굉장히 많은 업무가 있어서 다 나열하기도 힘드실 정도입니다. 이렇게 약사로 근무하시면서 보람이 있으시고 또 그만큼 또 어려운 점도 있으셨을 것 같아요.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 한 가지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서지은: 가장 힘들었던 건 인종 차별이었던 것 같고요. 제가 영어 이름이 클레어예요. 근데 같이 근무하는 호주인 친구도 클레어거든요. 그래서 전화로 약 상담이 왔는데 상대방이 ‘너는 누구 클레어냐’부터 시작해서 ‘나는 너한테 안 받고 싶어 다른 사람 바꿔줘’ 한다든지 아니면 실제로 약국에 오셔가지고 ‘다른 사람하고 상담하고 싶다’ 이랬을 때는 나는 지역사회를 돕고 사람을 돕고 싶은데 그냥 내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게 좀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많은 이민자들 분들이 많이 느끼셨던 분들도 있으실 거라고 생각해요.

홍PD: 그런 힘든 점이 있을 때는 좀 맥이 빠지는 경우도 있으셨겠네요.

서지은: 그렇죠. 열심히 돕고 하기 위해서 공부도 하고 했지만 인종차별이 너무 어렵더라고요.

홍PD: 이렇게 지나온 과정 생각해 보시면 ‘그래도 참 잘했다’ 이런 생각 많이 드실 것 같은데 뭐 아쉬운 부분도 있으신가요?

서지은: 저는 현재 삶에 불평을 갖거나 만족하지 못해 아니면 너무 불행해 그래서 다른 길을 찾아봐야 되겠다 그렇게 하진 않았어요. 제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그 최선을 다한 결과가 어떻게 영향을 미칠지 계산을 하지도 않았어요. 그렇지만 그 결과가 제가 꿈을 이루는 데 많은 도움이 됐고 그 사이에 중간중간에도 꿈을 항상 생각하면서 내 마음이 부르는 대로 혹시나 한번 알아볼까 이런 원하는 길을 많이 찾아보고 알아보려는 노력을 했습니다.

홍PD: 그렇군요. 참 많은 분들에게 서지은 씨 스토리는 많은 영감을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호주에서 같은 전공을 하고 계신 학생들, 또 한국에서 호주로 이민을 희망하는 분들, 또 결혼이나 출산 후에 경력 단절로 다시 취업하는 데 막연하게 두려움을 갖고 계신 분들에게 조언을 해주신다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어떤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서지은: 무언가 되고 싶은 꿈이 있다면 현재 갖고 있는 환경에서 환경을 탓하지 말고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만큼 최선을 다하세요. 그리고 그 꿈을 포기하지 마세요. 포기하지 않으면 그 과거에 최선을 다한 결과가 결국 꿈을 이루는 밑거름이 됩니다. 그리고 가족 중에 누군가 꿈을 갖고 도전하고자 할 때 믿음으로 묵묵하게 지켜봐 주시고 용기를 주는 말을 건네주시고 실패해도 돌아올 수 있는 휴식 공간이 되어주세요. 그런 지지가 꿈을 완성하는 데 꼭 필요합니다.

저에게 첫 번째 도전은 실패했지만 제가 약대 건물을 지날 때마다 부러운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병원 퇴사 후에도 그 건물로 가서 ‘공부하고 싶다 약대를 가고 싶다 수능을 보겠다’라는 다짐을 하게 됐고요. 두 번째 도전도 실패했지만 수능을 다시 준비할 때 기본부터 찬찬히 공부했던 영어 실력으로 호주에 오는 길이 열렸습니다. 세 번째 도전에서는 기존 간호학과 졸업 성적으로 약대 입학이 가능했어요. 과거에 열심히 하지 않았으면 입학조차 안 됐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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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 아이를 맡길 부모님도 안 계셨던 타국 땅에서 어린 아이들 3명과 함께한 약대 공부가 만만하지 않았지만 신랑과 아이들이 준 무한한 사랑과 믿음 이해와 용기로 오늘까지 왔습니다.

홍PD: 정말 주변의 가족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격려 그리고 많은 응원과 도움으로 지금의 서지은 씨가 있는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드네요. 마지막으로 앞으로 계획이나 또 희망하시는 포부가 있다면 좀 말씀 여쭤볼게요.

서지은: 현재 퀸즐랜드 정부에서는 약 20가지 증상에 대한 약사의 처방권 관련 교육이 시작되었어요. 그리고 그 교육을 이수한 사람들은 그 증상에 대해서는 의사만이 할 수 있었던 그 약들을 공급할 수가 있게 돼요. 뉴사우스웨일즈 정부에서도 그 교육이 시작될 거고 그 교육을 받고 싶고요. 현재 사춘기에 들어선 아이들이랑 시간을 많이 보내기 위해서 사실 석사 과정을 지금 잠시 멈췄거든요. 그 과정도 마치고 싶고 그래서 저는 약국에서는 엄마가 같은 존재가 되고 싶습니다. 엄마와 같이 우리가 문제가 있으면 제일 먼저 달려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래서 그 문제를 듣고 나누고 또 진정한 희생과 돌봄으로 또 해결점을 찾아주는 존재가 되어서 호주 지역사회에서 한국인으로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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